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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시계가 유명한 이유 (명품시계)

난다천사 2021. 9. 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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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1792년 성난 민중들이 파리의 왕궁으로 몰려왔다.

이 궁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머물고 있었다.

엄청난 군중에 겁을 집어 먹은 왕의 근위병들이 도망치기 시작..

하지만 오직 한 부대만이 필사적으로 군중과 맞서 싸웠음.

성난민중들과 근위병들이 서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프랑스 시민들이 이 부대에게

"퇴로를 열어 줄 테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회유했다.

하지만 이들은 퇴각권유를 무시하고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그 덕에 왕과 왕비는 궁에서 빠져나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전멸..모두 786명...이들은 스위스 출신의 용병이였습니다.

이들은 분명 목숨을 살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왜 이러한 싸움을 한것일까?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 NOs~~~ 그건 그들의 조국이 너무 가난했기때문..

나중에 죽은 병사에게서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유서엔

"우라기 프랑스와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이후 우리의 후손들은 아무도 용병으로 일하지 못할것"

이라고 쓰여있었다.

스위스는 알프스의 나라 , 산만 전 국토의 70% 에 이른다..(한국과비슷)

호수까지 합친다면 겨우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은 25% 불과 그나마도 추운지역이라 

냉해가 심해 농사짓기도 어렵다.

그러니 오랫동안 스위스는 늘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통했다.

장남은 그나마 작은 땅이라도 유산으로 받았지만 그 외의 형제들은 해외로 먹고 살길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용병으로 계약을 맺는것

스위스는 가난 했지만 군인들의 용맹함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폐활량이 뛰어났고, 체력도 좋았다

게다가 국격을 맞대고 있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싸우느라 많은 실전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스위스 용병들의 몸값은 매우 비쌌다. 그럼에도 모든 왕가가 급할때면 스위스 용병들과 계약

백년전쟁, 부로고뉴전쟁, 스페인.폴란드.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유럽의 큰전쟁 뒤에는

이들...스위스 용병들이 있었다.

로마 교황이 있는 바티칸 조차 수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경비는 오로지 스위스 용병에게 맡기고 있다.

왜 그럴까? 이들은 절대로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기 때문.

프랑스 혁명 떼에서 보듯 이들은 계약을 지키기 위해선 목숨도 감수.

용병얘기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스위스 시계가 왜 유명한지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신뢰와 가격이 비싸다"

또한 스위스 시계가 유명해진것은 중립국이라는 위치 덕분이다.

지도를 보면 스위스는 유럽의 거의 중앙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주변으로는 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 이탈리아..등등의 강대국들이 있다.

지리적 위치때문에 스위스는 항상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때문에 스위스는 오래전부터 생존을 위해 중립국을 추진해왔고

19세기 초에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서 다른 나라의 전쟁에 관여할수 밖에 없는 용병산업은 완전히 접게된다.

이제 왜 스위스 시계가 유명한지 이야기 해보자

16세기에 종교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에선 신교와 구교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프랑스에서 신교가 구교에게 패하면서 많은 신교인들이 스위스로 넘어왔다.

스위스는 칼뱅으로 대표되는 신교가 굳건히 자리를 잡았기 때문

이때 넘어온 신교인들중에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시계공들이 유독많았다

이 시기 스위스엔 보석 세공업 같은 정밀 수공업이 발달해 있었다.

검소한 삶이 강조되던 종교개혁이 인해 보석세공겁을 하던 사람들이

대거 시계사업으로 업종을 전환. 이들이 스위스로 넘어온 시계공들에게 시계제작 시술을 배웠고

여기에 세공업자 특유의 정밀함이 더해지자 품질이 뛰어난 시계들이 쏟아지기 시작.

스위스는 인구가 매우 적은 나라로 무역만이 살길.

이런면에서 스계는 스위스에 적합한 제품이였다.

좁고 험난한 산길이 많은 나라라 부피가 크거나 무거운 제품이라면 운송이 어려워 무역을 하기 힘들었을것이다.

하지만 시계는작고 가벼웠고 부가가치는 엄청났다. 스위스의 상인들은 큰 가방에 시계를 가득 담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시계를 내다 팔아 큰돈을 벌기 시작...

용병산업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스위스 역사상 첫 산업이 탄생한것이다.

이렇게 되자 18세기 후반에는 제네바에서만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계산업으로 일하며

연간 8만여개의 시계를 생산하게 됨.

지금 초고가의 명품시계로 세계를 휩쓰는 '시계의 나라' 스위스는 이렇게 만들어 졌다.

스위스 용병들의 몸값이 아주 비쌌고 그럼에도 모든 왕가가 이들과 계약했다...

스위스 시계가 바로 그랬다. 스위스 시계는 비쌌고 그럼에도 높은 품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그리고 이 기조는 오늘날 까지도 한결 같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부가가치가 높은 비싼제품만 판다"라는 것이다.

스위스 무역에는 또다시 용병들이 등장한다.

유럽각국에 용병들이 파견되다보니 각국의 시장 사정에 밝았고 이들을 신뢰하는 인맥들도 늘어나

쉽게 판로를 개척할수 있었다.

약소국이였을때 스위스의 지리적 위치는 최악이였지만 무역이 발달하면서 스위스의 위치는 

오히려 큰장점이 되었다.

스위스의 무역흐름을 보면 또하나의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역량의 집중화.

스위스의 인구는 현재 900만정도이다. 국토도 우리나라의 40%정도.

이작은 나라가 모든분야의 산업을 고루 발전 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스위스는 특정분야의 산업에 올인했고 그것의 대표적인것이 명품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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